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리뷰] 뮤지컬 위키드 - 우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카테고리 없음 2021. 4. 6. 04:03

    - 읽기 전에 -

    1.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으며 대략적인 줄거리 소개 없이 무턱대고 주접부터 떱니다. 공연을 아직 보지 않았다면 읽지 않을 것을 권장합니다.

    2. 이 사람은 뮤덕이 아닙니다. 전문가도 아니고 같은 공연을 수십 번 본 팬도 아니니 틀린 얘길 하더라도 둥근 지적 부탁드립니다.

    2. 추억에 젖어서 원작 소설 얘기를 가끔 꺼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소설 내용을 제대로 아는 건 아닙니다. 오로지 뮤지컬 속의 인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예정입니다. 이조차도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지난주 문화의 날에 뮤지컬 위키드를 보고 왔다. 종류를 불문하고 공연을 자주 갈 수 없는 처지에 코로나 시국까지 겹쳐서 너무 오랫동안 문화생활을 안 하다가 마음먹고 가게 된 공연이었다. 

     

    원래 기대를 많이 하고 갈수록 감동적인 관람을 하는 편인데 위키드를 향한 나의 마음은 켜켜이 쌓인 기대가 묵고 묵어서 쉰내가 날 지경이었기에 관람일이 다가올 때부터 이미 감격스러웠다. 관람 전날에는 잠을 설쳤고 보고 돌아온 날에는 아예 날밤을 새고 말았다. 한마디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묵은 마음이 풀리는 게 아니라 폭발해버려서 통장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다시 예매 경쟁에 뛰어들지 않으려면 뭔가를 해야 했기에 엠디를 정리하고 프로그램북을 정독하며 지금은 이미 공연이 전부 내린 상황이라고 홀로 최면을 걸다가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몇 년째 미루고 있던 블로그에 기록 남기기를 이렇게 실천하게 되다니.

     


     

    위키드의 이야기는 예전에 책으로 먼저 접했었다. 아니, 사실 그보다 시트콤 글리에서 리메이크한 무대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게 더 먼저였다. 그때의 나는 도무지 뮤지컬을 보러 갈 엄두는 낼 수 없었던, 그리고 마침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던 청소년이었기에 서점에서 벽돌 같은 책을 겁도 없이 집어 들었었다. 그러나 소설은 실망스럽게도 재미가 없었고 결국 1권을 채 못 읽고 덮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는 곳은 서울과는 더 멀어졌고 체력과 감수성은 점점 바닥이 나고 있지만 심야버스로 귀가할 자유와 택시를 탈 돈 정도는 생긴 어른이 되어 결국 오랜 숙원을 이룰 기회를 잡았다. 물론 그것만으로 되는 건 아니었고 다년간의 밴드 덕질로 다져진 티켓팅의 기본기가 없었다면 이번 기회도 놓쳤을지 모른다. 

     

    원작 소설을 뮤지컬화하면서 스타일을 완전히 바꿨다는 평을 풍문으로 듣긴 했지만 공연을 보다 보니 이거 그냥 2차 창작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억 속에 흐릿해져 가는 소설 내용과는 좀 많이 달랐다. 물론 소설은 도중에 내려놓고 말았지만 뮤지컬은 두 번 보면서도 눈물을 글썽였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바람직한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빠르고 극적인 전개, 정해진 권선징악의 결말과 친절하고도 깔끔한 액자식 구성이 내가 애써 읽어 내려가던 벽돌 책 두 권에서 나온 이야기라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마 소설을 접했을 때의 내가 너무 어렸던 탓도 크고, 뮤지컬을 통해 이야기의 구조를 대강 알게 된 지금 다시 읽는다면 사뭇 다른 감상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꽤나 무겁고 깊이 있는 중심 주제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대부분의 너무 문란(?)하거나 교묘한 사건들을 들어내고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꿈과 사랑, 권선징악의 극으로 탈바꿈시켰다는 건 박수칠만한 일이다. 

     

    도로시가 오기 전까지 오즈를 통치하던 마녀들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왜 어떤 마녀는 선한 이라 칭송받고 어떤 이는 사악함으로 치를 떨게 만드는지에 대한 심오하고 비판적인 주제의식은 접어두기로 한다. 뮤지컬에서 새롭게 묘사하고자 한, 서로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우정이라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거니까. 

     

    사람은 누구나 여러 종류의 타인과 부딪히고 만나서 적이 되거나 친구가 되고 또 헤어지며 끊임없이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인생을 뒤흔들 정도의 관계라는 건 흔하지 않다. 삶의 한 주기를 지나고 나서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관계,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이라서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는데도 그저 과거로 흘려보낼 수는 없는 관계 말이다. 그런 관계를 그냥 우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우정이라는 단어를 갖다 대기에 민망할 정도로 과하게 넘치는 정을 두고 곧잘 나오는 말은 “그건 사랑이지. 그런 게 친구면 난 친구 없어”같은 것이다. 우정을 가장한 사랑도 있고,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우정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두 주인공의 우정은 그런 종류의 관계는 아니었다. 서로를 가장 소중한 친구라 부르며 다정히 아꼈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함께할 만큼은 아니었던 우정. 사랑에 대한 욕망이 끼어들자 곧바로 상처를 남기며 틀어져버린 우정. 그러나 그들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우정은 두 사람의 꿈과 목표를 완전히 바꾸어버렸고, 잠시 틀어졌을지언정 영원히 깨어지진 않았다. 

     

     

     


     

    엘파바 역의 옥주현 배우, 손승연 배우 ⓒ공식홈페이지

    이야기 속에선 외면받는 삶을 살았지만 이야기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 모두에게는 마음속 영웅이자 주인공인 엘파바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사건사고를 변명하기 위해, 혹은 감내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사고였어.” 글린다 역시 사람들 앞에서 마녀의 악한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녀의 출생 이야기부터 꺼내놓기 시작한다. 축복은커녕 떳떳하지도 못했던 출생. 힘과 재능을 갖고도 아웃사이더로서 살아가야 할 그녀의 인생은 그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운명이었고 그것은 어떤 비범함을 타고나는 영웅 서사의 시작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숙명처럼 갖고 태어난 괴상한 피부색이나 알 수 없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선한 것을 좇는 마음이 어린 엘파바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그저 말썽 없이 조용히 지내는 것이든, 몸이 불편한 동생을 위해 모든 걸 보살펴주는 것이든, 마법의 재능을 갈고닦아 마법사의 인정을 받는 것이 든 간에 결국 자신은 좋은 일을 해내서 좋은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 부당한 꾸짖음이나 놀림에도 그 믿음을 꺾지 않으려는 의지. 무한한 미래를 꿈꾸던 학생 시절부터 스스로 사악한 마녀가 되기로 결심할 때까지, 엘파바의 삶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피부색만큼이나 당연하고 지워낼 수 없었던 것은 선에 대한 믿음과 의지였다. 

     

    그러나 그 올곧은 속성 때문에 언제나 외롭고 요란하게 흔들리던 신념에 글린다는 작은 씨앗을 떨어뜨렸거나, 혹은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켰다. 엘파바의 눈엔 말도 안 되는 난리법석일 뿐인 파티에 네사로즈를 초대한 글린다의 작은 배려가, 언제나 안쓰러운 존재였던 동생에게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해줄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일으킨 기쁨의 파장을 본 후 엘파바는 더 이상 자신의 기준으로 글린다를 재단하고 배척할 수 없게 된다. 무도회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글린다의 손길로 꾸며진 자신의 얼굴을 거울로 들여다보며 그녀 자신도 느꼈을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저 밀려오는 기쁨을 누리는 그 순간이 이해할 순 없어도 누군가의 삶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엘파바는 글린다를 통해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글린다 역의 정선아 배우, 나하나 배우 ⓒ공식홈페이지

    반면 글린다는 엘파바와 정반대의 사람이었고, 그녀에게 선함이나 신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엘파바와는 달리 주변인들로부터 '착하다'는 평가를 밥먹듯이 듣고 그것을 즐기지만 그 내용보다는 칭찬과 선망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었기에. 친구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취해 룸메이트에게 못된 장난을 치기도 하고 남자 친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명감을 꾸며내느라 자신의 이름까지 개명하는 그녀에게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옳고 그른지는 생각해볼 가치조차 없는 문제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죄책감을 내비치는 순간은 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습관처럼 베풀었던 작은 선행이 진심 어린 큰 보답으로 되돌아왔을 때이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방식으론 어떻게 해도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보답이랍시고 선뜻 베푼 이가 언제나 자신의 즐거움의 희생양이 되곤 하는 엘파바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그때 글린다는 처음으로, 남들의 관심과 칭찬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심에 보답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며칠 전 뮤지컬 홍보 인터뷰에서 글린다역의 나하나 배우가 글린다의 드라마를 가리켜 “착한 글린다에서 선한 글린다로 향하는 여정”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 두 가지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르기도 해서 극의 초반과 후반을 비교해볼 때 그 변화와 성장의 정도가 더 두드러져 보이는 쪽은 엘파바보다는 글린다이다. 무도회장에서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의 엘파바를 마주 보고 설 때, 글린다라는 혜성 혹은 시냇물은 훗날 그토록 먼 곳에 이르기 위해 조금씩 제 경로를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식홈페이지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그리 오래 함께하지는 못한다. 엘파바의 능력이 인정받아 마법사에게로 불려 가기 때문이다. 엘파바는 글린다를 동행한 채 에메랄드시로 향하지만 그들이 그곳에서 마주하게 된 건 상상과는 다른 모습의 기로였다. 엘파바는 선이라 믿었던 지도자의 허위를, 글린다는 권력이 정하는 선악의 진실을 마주한다. 비록 짧은 대학생활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배우고 받아들였지만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 앞에서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그들 각자의 믿음은 확고하게 완성되고, 같은 날 같은 장소와 상황에서 그들은 다른 선택을 한다. 엘파바는 자유와 정의를 찾아 하늘로, 글린다는 성공과 안전함을 좇아 땅으로 갈라선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서로의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엘파바는 어둠을 틈타 날아다니며 억압받는 동물들을 풀어주는 투사로서의 삶을, 글린다는 사회악으로 간주되는 엘파바에 반대편에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선의 상징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글린다와 엘파바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다른 주변 인물들에 대한 감상도 털어놔야 하겠다. 내 마음속 세 번째 주인공은 네사로즈이지만 그래도 의무적으로 피에로 이야길 먼저 하려고 한다. 

     

    피에로 역의 서경수 배우, 진태화 배우 ⓒ공식홈페이지

    읽다만 원작 소설 속의 피에로는 초반부에 그다지 존재감이 없었던 인물이라 공연을 예매할 때가 되어서야 삼각관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예매 후 행복 회로를 돌리며 뉴욕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들을 땐 가사를 몰라서 그냥 가련한 비운의 남주인공인 가보다 했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디즈니 왕자 같은 캐릭터였다. 매력적인 외모와 허세, 약간의 백치미, 가벼운 성격, 내면의 공허함까지. 무대에 존재만 해도 로맨틱한 무드가 만들어지는 말 그대로 왕자님이었던 것이다. 디즈니 남주들이 그렇듯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삶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지만, 이 작품은 여성 투탑 주연이라 애석하게도 남주에게 할애할 수 있는 서사적 공간이 넉넉지 않았고, 그래서 피에로의 변화는 약간 급작스럽게 보인다. 극 초반의 피에로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넘버 Dancing Through Life가 있긴 하지만, 그 후에는 피에로의 내면을 엿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놀기만 좋아하던 말썽꾼이 에메랄드시의 수비대장이 되기까지의 심경의 변화라던가, 글린다가 행복해진다면 결혼도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상상 속에서는 갈 곳 없는 엘파바와 함께 도망가는 계획을 구상했을 피에로를 쉽게 이해하긴 힘들다. 어쨌거나 피에로는 다른 두 주인공보다는 느리게 혹은 보다 더 급작스럽게 변화를 결심했고 겉으로 보이는 자신의 행복한 모습보다 보이지 않는 불행한 모습을 알아봐 준 엘파바에게 이끌려간다. 

     

    여담으로 두 회차의 공연을 몰아서 볼 당시에는 진태화 배우의 피에로를 두 번 볼 수 있어서 행복할 뿐이었는데 막상 돌아오고 나니 서경수 배우의 피에로를 보지 못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쉬운 일이 되어버려서 현재 자꾸 인터파크 페이지를 들락거리는 주원인이 되었다. 나름 최선의 날짜와 회차를 골랐지만 고작 두 번 보면서 더블 캐스팅된 모든 배우들을 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러면 곤란하다……. 가깝던가… 재관람 할인이라도 해주던가… 하다못해 자리라도 있던가…….)

     

    보크 역의 임규형 배우 ⓒ공식홈페이지

    피에로와 달리 먼치킨 소년 보크의 이미지는 소설을 보며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내가 상상했던 모습이 영화 반지의 제왕의 호빗들 같은 그저 가볍고 덜떨어진 소년이었다면 뮤지컬 속 보크는 안쓰러울 정도로 당하기만 하는 촌뜨기 소년이었다. 글린다 앞에서 수줍게 웃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가 파티에 입고 온 사복 보고 기절할 뻔했다. 그 후로도 보크는 계속 불쌍하고 눈치 따윈 보지 않는 역할을 해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네사로즈 역의 전민지 배우 ⓒ공식홈페이지

    그리고,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음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공연 후반부터 막이 내린 후 공연장을 나서면서도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또 다른 서사를 가진 인물이 바로 네사로즈다. 오즈의 마법사 이야기에서 영문도 모른 채 시작부터 죽은 채로 등장했던 두 다리. 살아있었을 때 동쪽의 순박한 주민들을 폭정으로 다스렸던 동쪽 마녀의 과거를 들여다보는 시간은 길지 않았음에도 참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닌데도 주변인들에게 끝도 없는 애정과 보살핌을 갈구하며 그들을 속박하는 네사의 모습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스스로의 혹은 가까운 주변인의 어두운 인간상이며, 엘파바가 자기 의심과 외로움을 안고 세상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만큼이나 이입하기 쉬운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엘파바나 글린다와는 달리 추구하는 꿈이나 가치관도 없었다. 피에로는 심지어 대충 살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네사의 삶은 그저 스스로에 대한 연민만이 가득한 세계였고, 그곳에 비친 한줄기 빛과 같은 사랑을 붙잡기 위해 네사는 자신을 어둠 속에 가두어버린다. 어떤 비범한 역사도 교훈도 남기지 않는, 그저 아프고 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비극이 현실의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고 많은가. 엘파바는 삶에 계속해서 찾아오는 비극에 자신의 선의가 대체 무슨 소용이냐며 비관하지만, 사실은 선을 향한 그 집착이 엘파바를 더 큰 비극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주었을 것이다. 

     

    마법사 역의 남경주 배우, 이상준 배우 ⓒ공식홈페이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말하자면 마법사도 못지않다. 사람 좋게 웃으며 무력한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부도덕한 일을 계획하고, 부드러운 말로 구슬리며 궤변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마주친 모든 어른의 실망스러운 모습이고, 트라우마로 남은 믿음에 대한 배신이며, 살아가는 동안 점점 더 잃어가게 될 세상에 대한 신뢰이다. 고작 이렇게 가벼운 사람의 허영심 때문에, 고작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는 현실 앞에서 청년들과 청소년들은 얼마나 절망했고 또 앞으로 얼마나 절망할 것인가. 그러나 곧바로 초라한 현실을 스스로 돌파하고자 하는 엘파바와 그 체제를 통해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하는 글린다의 의지는 얼마나 희망적인가. 

     

    딜라몬드 교수 역의 이우승 배우 ⓒ공식홈페이지

    딜라몬드 교수는 사람에 따라 누군가를 반드시 떠올리게끔 하는 인물이다. 제자들에게 학문이 아니라 관점을 가르치려던 은사들, 물로 칼을 베려다 스러져간 사람들, 자신이 기억하는 좋았던 세상을 끝내 후대에 돌려주지 못한 노년의 누군가 등을 말이다. 극 중에서 딜라몬드 교수의 죽음을 암시하진 않지만 마지막으로 등장한 그의 모습은 외로운 싸움에 지친 나머지 그토록 혐오하던 마법사와 타협하려 하던 엘파바의 마음을 끝내 돌아서게 만들 정도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보이지 않는 악행은  모르는 척할 수 있지만, 나에게 가까운 이에게 닥쳐온 불행을 모르는척하는 것은 마법사처럼 무책임으로 똘똘 뭉친 사람에게도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완벽한 타인을 향했다고 생각했던 혐오와 선동의 피해는 반드시 내 주변에도 닥쳐온다.

     

    모리블 학장 역의 이소유 배우, 김지선 배우 ⓒ공식홈페이지

    모리블 총장은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봤다가 꽤나 자주 등장하는 걸 보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캐릭터였다. 공식 소개말에서는 선악을 오가는 인물이라고 설명해뒀던데……. 내게는 극 중 유일하게 선악이 모호하게 묘사되지 않는 납작한 악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누군가에겐 비난받을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관객에게 사연을 늘어놓으며 동정과 응원을 구한다. 하지만 모리블 총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과한 화장과 굵직한 목소리, 법석 떠는듯한 말투와 속물적인 태도를 보이며 정을 줄 수 없게끔 만든 인물이다. 대사 알아듣는 게 조금 벅찼고, 극 중에서 꽤 많은 역할을 하고 잊을만하면 존재감을 과시하면서도 캐릭터 자체로는 너무 단순하고 가벼운 악역인 것만 같아서 아깝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단 한번 가식적인 말투를 버리고 글린다를 위협하던 장면이 더욱 인상 깊었다. 2회차 관람 때 이 장면을 다시 보고서야 비로소 모리블 총장이 바로 글린다가 엘파바를 알지 못했다면 될 수도 있었을 어떤 괴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색을 드러내기 전 동요하는 글린다에게 그녀가 대충 둘러댔던 말들, “엘파바는 제 한 몸 알아서 잘 지킬 거예요.”, “네사로즈의 운명이 박복했나 보죠.”는 그 속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을 뿐, 겉으로는 글린다가 피에로와 엘파바에게 위로랍시고 건넸던 말들과 아주 비슷하다. 그녀가 내뿜고 다니는 너무 강력한 비호감 조연의 아우라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하지만 초반에 눈치챘어야만 했던 사실을 나는 한발 늦게 깨달았다. 모리블 총장은 사실 항상 상냥한 말씨로 학생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해주며 한편으론 더 높은 단상에 서길 애쓰던 금발의 여성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면전에 대놓고 경멸한 사람은 글린다뿐이었고 그것은 아마 글린다가 자신과 비슷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해보고 나면 마법사도, 딜라몬드 교수도, 네사로즈도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아슬아슬하게 피해 간 비극의 단면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마지막 넘버 For Good에서 이들이 말하던 일생의 변화는, 단지 엘파바가 글린다를 통해 학교에서 외톨이 신세를 면했다거나 글린다가 엘파바를 통해 에메랄드시에서 성공가도에 접어들었다거나 하는 표면적 사건들보다 그 이면의 것을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글린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특별했던 우정이나 간절히 원했던 사랑을 등질만큼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기쁨에 목메던 와중에도, 모리블 총장이나 마법사가 그랬듯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일에는 무감각해지지 않았다. 이것은 단지 그 둘에 비해 글린다가 경험이 적고 순진해서가 아니라 엘파바와 나눈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나 희생양이었던 그녀의 신념과 열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봤기에, 모두가 한 사람을 악마화하며 안심하는 동안 누군가는 상처 받고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깊게 고민하지 않고 웃으며 손 흔드는 것을 누군가 악의로 이용하는 동안 누군가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다른 죽은 이의 유품에 집착한다는 걸 알았기에, 글린다가 추구하는 것은 모리블 총장이나 마법사와 비슷했을지 몰라도 그 가는 길은 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엘파바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그녀의 단 하나뿐인 친구에게서 받은 온기와 축복이 없었다면, 엘파바는 불행과 피해의식에 잠식되어 악을 휘두르던 네사로즈처럼 될 수도 있었다. 오즈를 단결시키는 ‘선한 글린다’의 행적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딜라몬드 교수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까지 신념을 위해 싸우다 외롭고 참담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었다. 엘파바는 글린다 덕분에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사람들이 기뻐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도 선의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파바는 사악한 서쪽 마녀에 대한 세간의 원성이 극에 달 했을 때, 악의 상징으로서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택했다. 뒷일은 ‘선한 글린다’에게 맡기고 엘파바는 연인의 팔짱을 낀 채 무대에서 퇴장한다. 

     

    극의 첫 장면으로 이어질 2막의 마지막 장면이 아름답고도 묵직하게 슬픈 것은 이러한 변화 때문이다. 잠시 1막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자신의 능력으로 한계를 떨치고 날아오른 엘파바를 올려다보며 축복을 전하는 글린다는, 친구 만큼의 능력도 확고한 뜻도 없지만 그저 자신이 아는 익숙한 세상에 남아있기를 선택한 작은 청년이었다. 그러나 2막의 마지막에는 모두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글린다가 하늘 높이 떠서 오즈의 미래와 함께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축복하며 오즈를 떠나는 엘파바는 그 땅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던 악명과 함께 무거운 드레스를 벗어던진 평범한 사람이다. 사랑을 누리기로 한 엘파바와 선을 위해 일어선 글린다, 이것이 이들이 서로의 삶에 그은 획이고 심장에 남긴 손자국이다.

     

    흔하지 않다. 서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길로 갈라서고 나서도 어쩐지 함부로 판단할 수가 없는, 중력에 이끌리듯 계속해서 생각나거나 예기치 않게 마주치면서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사소한 계획을 하나둘 망쳐놓더니 결국에는 일생을 변화시키는 관계는 말이다. 흔하지 않기에 그런 관계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된다. 이렇듯 아름다운 상호 성장과 구원의 관계를 단지 우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만 우정이 아니면 달리 뭐라 부를 수 있을까.

    댓글

Designed by Tistory.